피그헤드랩 개관 3주년 이벤트 전시 <burn again>_20231202-20240131
피그헤드랩 개관 3주년 이벤트 전시 <burn again>_
참여작가 : 고민정, 김유주, 나미현, 박준식, 석민정, 손승범, 이채연
2023년 12월 2일부터 2024년 1월 31일까지 / 운영시간 : 12:00-20:00 / 유인 혹은 무인 운영
오프닝 리셉션 : 12월 2일 오후 4시
<번 어게인>을 위한 메모
<번 어게인>은 피그헤드랩의 3주년 전시명이자 일종의 행사명이기도 하고, 또 작은 실험명이기도 하다. 월간지 <지금 이시각>에서 몇 차례 밝힌 바이기도 하지만, 피그헤드랩은 지속적으로 기획의 형식을 취하며 협의의 과정을 통해 전시를 제작해오고 있다. 그러나 근래에 들어 이것이 만들어지는 형태의 형식적인 지점에 대한 피로감을 무시할 수 없었다. 물론 이는 피그헤드랩이 운영되는 환경의 영향이 제일 클 것이지만, 한편으로 지속하여 시각예술이 전시로 만들어지는 과정과 행태가 어떤 깊이감과 공감대의 한계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느끼며 기획자이자 공간의 디렉터, 그리고 예술가의 아이덴티티로 고민의 시간을 갖게 되었다.
다시 이런 이야기들은 몇 차례 글과 수다를 통해 고백한 바 있으니 한 켠으로 접어두고, 피그헤드랩이 3주년 차가 되며 동기부여와 향수의 장이 필요하다 느꼈다. 내가 왜 피그헤드랩이란 공간을 만들었는지 또 왜 사람들과 함께하고자 하였는지 등 어떤 개인적인 아트웍의 개념에서 시작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전시를 만드는 행위 자체에 대한 나름의 스터디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그림(작품)을 모으고, 이를 엮어 이야기를 구성하고, 관객들에게 선보이고 부가적인 홍보의 과정을 거치며, 스탠다드한 전시 아카이브의 형식들을 고민하는 것. 이것이 어떤 행동의 관습으로 자리잡는 과정에서(물론 이것이 전시 프로세스의 한 행태임을 알고 있지만), 다시 일종의 놀이처럼 즐겁게 또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고민해보았다. 그리하여 매년 주최하는 피그헤드랩 연말파티와 궤를 같이하여 참여하는 이들이 즐기며 함께할 수 있는, 적어도 어떤 공간을 방문하고 대화를 나누고 문화를 향유하는 것에 있어 작업을 전시하는 이나 관람하는 이나 되도록 모두가 즐겁고 부담감을 줄일 수 있는(심지어 기획자 본인조차도) 작은 시도를 해보는 것이 바로 본 전시이다. 물론 여기서 가벼움이라 함은 전시에 경중을 구별하기 보다 참여자나 진행자나 부담 없는 마음으로 관여하는 바를 뜻한다.
연말 파티의 경우 많은 이들이 즐겁고 가벼운 마음으로 참여해주었다. 피그헤드랩이 다소 협소한 크기에 좌석의 제한이 있음에도 많은 이들이 긴 시간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며 음식과 술을 함께 나누었다. 피그헤드랩은 간단한 핑거푸드와 맥주, 그리고 뱅쇼를 제공하였다. 그리고 자리가 깊어지면서 피그헤드랩을 운영하는 것에 대한 고민들을 조심이 내비치는 자리도 가져보았다. 무엇보다 당일 작품을 들고 참여해주신 작가분들께 매우 감사함을 느낀다. 즉흥적인 전시인 만큼 고민이 있을 수도 있겠으나, 흔쾌한 마음으로 참여를 해주어 매우 감사함을 느낀다. 또 꼭 전시에 참여하지 않더라도 관심과 사랑으로 자리를 함께 해준 분들도 포함하여, 다음 한 해에도 피그헤드랩을 열심히 운영해가겠다 마음먹게 되는 것이다.
다음은 전시에 참여한 작품과 작가명, 그리고 작품을 보고 나서 나의 감상을 남긴 것이다. 이번 전시의 경우 물론 피그헤드랩과 인연이 있던 이들이 다수 포진되어 있지만 초면인 경우도 있었다. 그러다 보니 전체적인 작품을, 주어진 정보를 배제하고 최대한 걸려있는 모습 그 자체로만 감상해보고자 한다.
작품에 대한 감상
고민정
점묘화로 표현한 홍학그림. 개인적으로는 참 좋았다. 근래에 들어서는 나이를 먹어감에 따른 변화인지, 삶이 퍽퍽 해진다 느껴서 그런 건지 너무 많은 힘이 들어가지 않은 그림에 사뭇 눈길이 쉬어 가는 것을 느낀다. 처음엔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의 일러스트를 떠올렸다. 초판(이 맞는지 모르겠지만)이 가진 근대 일러스트의 판화처럼 찍어낸 듯한 그 느낌을, 나 이외에도 꽤 많은 이들이 좋아하는 것으로 안다. 본 그림 또한 작은 크기 안에 정교한 느낌, 예컨대 판화의 형태 등을 품고 있는데 홍학도 홍학이지만 뒤 편에 수풀이 우거진 모습은 그림 크기를 감안해도 꽤 정교하게 그려져 있다. 다시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로 돌아가, 실제로 소설에도 홍학이 등장하기 때문에 어느정도 오마주 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피그헤드랩의 조명 때문일지 종이가 가진 배경 색은 거의 완벽한 하얀색이지만, 살짝 푸르스름한 느낌을 띈다.(혹은 재료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다 보니 더욱 이 세밀한 그림은 묘한 안정감과 함께 기계적인 느낌 또한 자아내고 있다.
뒤 편에 풍선이 하나 날라가고 있다. 이는 이것이 몽환적인 이야기를 지향한다는 코드가 되겠지만, 한편으로 기법 때문인지 뱅크시의 그것이 떠오르기도 한다.
김유주
작은 그림들이 모자이크처럼, 타일처럼 구성되어 있었다. 일상의 흔적들(확실치 않다)이 잔뜩 나열되어 있는 이 파편들은 작가가 겪어온 어떤 시간들의 흔적이기도 할 것이다. 이러한 작업들은 대체로 시도하기 좋고 또 누구나 공감하기도 좋지만, 꾸준함과 일정 이상의 양을 유지하는 게 쉽지 않을 테다. 그래도 나는 가끔 작업의 소재가 떨어져 고민하는 이들에게 권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작가는 이것을 쇼핑백에 담아와 나에게 전달하였는데, 순간 받으면서 이것을 어떻게 붙여야 하지 하고 당혹스러웠다. 아무튼 결과적으로 본 작품은, 작가의 작품과 나의 설치가 콜라보레이션 된 일종의 협업이라 할 수도 있겠다. 작가는 내가 실제로 이것을 다 붙일 것이라 생각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술을 몇 잔 들이키고 흥겨운 와중에 설치를 하다 보니 조금 삐뚤어진 지점들이 있었다. 다음에 다시 보수하겠다 생각했는데, 며칠이 지나고 나니 어쩌면 그림의 주제와 맞는 것 같아, 인간미 있어 좋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미현
푸른 배경의 캔버스 위에 어떤 자국들이 퍼져 나가고 있다. 이 심플한 그림은 매우 작아서(2호정도) 사실상 이 흔적만이 보이는데 처음에는 밤하늘의 별이나 폭죽 같은 것은 아닐까 생각을 하였다. 그러다 문득 과거의 어떤 성화들의 도상이 떠올랐다. 과거의 그림들은 어떤 인물이나 권능을 표현할 때 빛이 번져 나가는 것을 보이고자 하였고 그것을 난색이나 흰색의 직선들로, 더 원초적으로는 어떤 자국들이 번져 나가는 것으로 표현하였다. 이 퍼져 나가는 것을 일종의 빛의 덩어리라고 가정해보았을 때, 그림 한 가운데 부분, 완전한 중심이기 보다 상단에 좀더 공간을 확보하고 자리잡은 주연과 양 옆 위쪽으로 심어 놓은 조연, 이렇게 보면 이것 또한 정통적인 성화의 구도 중 하나이다. 하늘에서 권능이 땅으로 퍼져 나가며 양쪽에서 아기 천사들이 호위하는 그런 그림들을 우리는 어디선가 다 보았을 것이다. 그 생각을 하고 나니 이 작은 그림이 마치 성화처럼 보이는 것이다.
박준식
교과서적이지만, 창작이란 것은 그 주최자의 욕망을 가장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방법 중 하나일 것이다. 역시 교과서적이지만 관객들은 작품을 보며 작가가 어떤 감정으로 이것을 표현하였을까 유추하는 것이 또 나름 감상법 중에 하나이기도 하다.
엽서크기의 이 작은 그림들 뭉치는 제일 첫인상부터 강한 욕망을 내비치려 한다. 대게는 폭력성이 먼저 보일 것이다. 대체로 그림들 안에 사용된 코드들은 기술적으로 정통적인 방식인데, 두껍고 짙은 선이 가득한 화면 내에 검은색으로(경우에 따라 빨간색 등도 활용되어) 배열된 이미지들이 각자 강렬한 언어코드를 가지고 관객들을 향해 무언의 압박을 주고 있다.
본 그림들을 보며(농담처럼 하는 말이지만), 이런 느낌의 그림들이 많이 보였던 상황은 어떤 갈등과 두려움이 퍼져 나가던 때라고 생각한다. 과거의 프로파간다 미술이 그러하였고 사회주의 미술이 또 그러하였다. 병력을 모집하고자 할 때, 군중의 단일화된 행동을 독려할 때, 말하고자 하는 자의 힘을 강조할 때 보여지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느낌의 그림을 마주할 때면 그가 관객과 힘싸움을 하려 하는구나, 세상과 부딪쳐보려 하는구나 이런 생각을 하고는 한다. 작은 역사의 반복을 느끼고는 한다.
석민정
이번 리뷰는 출품작과 작가에 대한 사연을 담지 않고자 하였지만, 이 작품은 예외여야 하겠다. 이 그림은 작가의 교습소에 다니는 한 아이의 그림이라고 한다. 어느 수업시간, 교습소의 아이들에게 ‘사람의 옆 모습’ 사진과 ‘매’(조류)의 사진을 나눠주고 따라 그려보라고 하였는데, 한 아이가 자기가 생각하는 사람과 매의 모습을 그리고선 밑에 ‘옆모습’과 ‘매’라고 써놓았다고 한다. 아무리 봐도 옆 모습 같지 않은 옆 모습과 무엇인가 외각선만 따라 그린 듯한 매의 모습을 보며 작가는 다양한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나는 이 얘기를 들으며, 우리가 미술이라는 것을 배웠을 때 그것이 학문이 아닌 기술로서 학습되는 것처럼 느낀 것을 떠올렸다. 꼭 미술뿐이겠는가. 대체로 우리가 커리큘럼을 통해 배우는 것들은 어떤 보편성에 의거하는 방법들이 아닌가. 이 아이의 그림은, 학습이라는 개념과 아이가 피운 나름의 요령 사이에서 묘한 희열을 전달한다고 본다.
손승범
작가의 작품은 도상학적인 관점으로 솔직하고 또 적절하게 표현되어 있다. 크게 3가지의 요소로 구분하여 볼 수 있는데 첫째는 탑, 둘째는 빛(꼭대기의 하얀 구체)과 선, 셋째는 마치 우주를 형상화한 것 같은 분위기이다. 탑의 경우 남성성을 필두로 한 인간 역사의 위대함으로 해석을 하는 경우도 많으나 본 작품에서는 과거의 유산, 필멸을 전제로 한 존재하는 것 자체의 의미가 더 크다고 생각한다. 빛과 선의 경우 도달하고자 하는 것, 그러나 어떤 길을 통해 반드시 도달하는 것이기보다 궁극적 의미로의 진리와 같은 상징성을 보인다. 이는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무언가로, 작가 본인도 이것을 명확히(어떤 보편적인 언어로) 표현하기 어렵기에 이것을 공란처럼 비워 놓는 듯 싶다. 마지막 우주과 같은 분위기는 표현 그대로 드라마틱한 순간을 관객들에게 제시한다. 이 셋은 공통으로 시간과 흐름, 도달하고자 하는 것의 과정, 그리고 거대한 시간 앞에 무력한 나 자신을 의미하기도 한다. 기술적으로도, 의미적으로도, 해석하는 과정으로도 교과서적인 작품이라 생각한다.
이채연
내 갈길을 가자. 소담하지만 상당히 강한 한마디이다. 만약 글귀만 보았다면 엄청 큰 캠퍼스(혹은 철판)에 빨간색 유광 페인트를 뿌리고 휘갈기듯 두꺼운 롤러붓으로 6글자를 휘갈겨 쓰는 상상을 하게 된다. 하지만 매우 작고 아담한 크기의 종이, 그것도 한쪽 끝이 찢어져 있는 데다 액자는 종이에 비하면 조금 오버 사이즈 느낌도 난다. 종이 자체가 물감을 흡수해서 마치 짙은 핑크색처럼 보이기도 하는 글귀와 못난이 발 이미지는 퍽 귀엽기까지 하다.
살다보면 인생은 희노애락 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감정이란 단순하지만은 않아서 크거나 작거나 반전이 있거나, 너무 거대해서 무감각해진다거나 혹은 끝에 가서 묘한 씁쓸함이 남는 등. 이 그림을 보며 나는 너무나 작고 소중한, 그러면서 나름의 반항심과 위대함을... 그러다 다시 바람 불면 날아갈 듯한 묘한 가벼움을 느낀다. 그게 살아가는 과정 아닌가 하면서.